나의 이야기

벌초

돌처럼 2023. 9. 10. 17:39

 

 

고추를 널어야 된다며 아침 일찍 내려오라는 울엄니 말에...

 

시골향(向)을 이루자마자 비닐하우스 안에 쪼그려앉아 고추널기를 한다.

세물고추를 따놓은지 2주나 지났지만, 두물고추가 날씨 탓에 늦게 말랐으니 

이제사 차양막을 걷어치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오롯이 가을빛을 담게 된다.

 

 

고추를 널고 산밑밭 둬고랑의 땅콩을 살피는데

내 보기엔 뽑아도 될 것 같은데 울엄닌 더 여물게 놓아두란다.

견본품으로 뽑아온 두포기의 땅콩은 중닭이 된 병아리들이 연실 쪼아대고...

 

골짝마다 예초기 소리로 벌초시즌은 피크를 이루고...

나도 어정쩡한 시간을 집 옆 산에 올라 선친묘 2기를 깎아내는데 보내기로 한다.

 

이웃집엔 벌초를 위해 형제자매들이 모여 밤깊은 시간을 이야기로 쪼개놓고 있는데

울 친척들은 조상묘의 벌초를 언제할 것인지 기별도 없고

봄부터 울던 소쩍새만이 소쩍이며 내마음에 서정을 불어넣고 있다.

그냥 이번 주말엔 아버지 산소와 조부모 산소나 벌초를 해야겠다고...

 

휴일,

아침일찍 아버지 산소를 벌초하고 오니

손아랫누이가 와 있었다.

 

 

 

힘듦에 지쳐감인가?

예전 같았으면 혼자 나섰을 조부모의 벌초길인데

손아랫누이의 동참을 바라고 선다.

 

건너마을 재넘어 있는 조부모의 산소와 고조부의 산소를 깎고

좀 떨어진 증조모의 산소도 깎았다.

 

 

발길이 뜸하니

풀과 덩쿨들이 얼마나 크게 덮었는지,

손아랫누이가 없었다면 녹초가 되어 산도 못내려왔을 듯 싶다.

 

 

들깨들이 꽃을 피우고 선 지금

뜨겁게 익어가던 고추도 곧 찬서리를 두려워하는 철이라고 느끼는 건지

크기를 키우지않는 파란 고추만 잔뜩 매달고,

기세좋던 호박덩굴도 시커멓게 고꾸라져간다.

 

따가운 빛과 선선한 어둠의 줄다리기에

고추를 널은 울엄니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가을이 드리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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