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비 내리는 모습에서

돌처럼 2021. 4. 22. 14:29

 

창밖을 보니 해의 떠오름 대신 비가 내리고 있다.

아카시아 잎에 잠시 머물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동심원을 그려내며 내림을 마감한다.

아마, 이 비를 새벽녘 잠결에 지붕을 두들기는 소리와 처마밑을 통해 일정한 간격의 음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들었더라면 알지 못할 마음속 향수에 대한 그리움과 잠의 포근함을 느꼈으리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잠시 비에 대한 느낌을 가져본다.

간혹, 그때의 시정(時情)에 따라 비가 내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다르지만, 한햇동안의 비에 대한

느낌을 생각해보면 계절에 다른 느낌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트고 연두빛 새싹들과 온가지 꽃들로 자연을 내보이는 대지의 호흡소리가

들릴 때 조용하게 내리는 봄비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포근한 눈길같이 따스해진

해를 바라보며 풀잎 위에 앉아있는 어떤이에 뒤로 살며시 다가서는 님의 발자국 소리같이 그렇게 다가와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 있는 포근함과 마음의 설레임을 만들어 놓는다.

그 포근함과 설레임이 옷이 비에 젖어 타인에 내 모습이 애처롭게 보인다 해도

그냥 그 봄비를 맞고 싶음으로 유혹한다.

 

모든 연두빛 새싹들이  제모습의 무성함을 보이고 그 위로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닿는 계절,

벌침 맞은 강아지의 뒹굴음 마냥, 차분치 못한 내마음의 짜증스러움이 널부러지는 모양같이

요란스레 땅을 두들기며 '魔'의 존재를 보이듯, 여름비는 그렇게 다가선다.

간혹, 무더운 여름날에 흙냄새를 물씬 풍겨내며 내리는 소나기와 그 소나기 뒤에 구름사이로 내비치는

밝은 햇살을 받으며 그려진 무지개가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보다

더 아름답기라도 하듯 보여주지만, 대체로 여름비는 자연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해내기보다는

자연앞에서의 무력감과 슬픔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능력이 자연앞에서 별것이 아님을 깨우쳐주는 지도 모른다.

 

투명한 물빛마냥 하늘은 깨끗함으로 섬세해지고 초록도 형형색색으로 손짓하던 날,

비에 대한 느낌이 없는 것을 보니, 비가 오지않기를 간절히 바랬나 보다. 날이 갈수록 낙엽의 수는 늘고

모든 사물들이 숙연해지는 어느 가을날에 흩어지는 가을비는 많은 감상을 만들어 내고 그 감상은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하여 나에게는 가을의 영글음을 만끽하게 하기보다는 쓸쓸함을 안겨다 주어

나를 초췌한 모습으로 변하게 한다.

 

떨어진 낙엽위로 흩날린 빗방울이 어느 누구의 반겨줌도 없이 낙엽의 생명과 가을의 정취를 앗아가면,

어느새 겨울의 입김이 와 닿는다.

겨울로 들어서면 비를 만나기가 드물다.

겨울 하면 하얀 눈이 떠오르고 그만큼 사람들도 겨울에서는 어떤 마음의 정서와 삶의 여유를

하얀 눈에서 찾고 또한 그러기를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속에서 겨울비는 실망을 안겨다주고 내린 겨울비

뒤로 더 두터운 옷을 두르게 하지만, 겨울에 늘상 기대했던 것에서의 탈피로 예기치 않은 산뜻한 충격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가령 졸린 얼굴에 세숫물 같다고나 할까.

 

 

봄비 내리던 날

움츠린 가슴 열고

사랑미소 보이던 날

 

여름비 오던 날

자연의 사나움에

한숨 내쉬던 날

 

가을비 흩날리던 날

우산 접어들고

외로운 자취 남기던 날

 

겨울비 소리 있는 날

기대하지 않은 기대에

초연한 삶의 날

 

 

어느새 비는 그치고 시야로 갓 세안한 여인의 청초한 얼굴 모양같이 모든 사물들이 청명하게 들어온다.

아카시아 잎새에 매달려 엷게 내민 아침햇살을 머금은 빗방울이 여인의 귓볼에서 빛나는 작은 귀고리 처럼 앙징스럽다.

우리,

가끔은 농부가 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비를 기다려보자.

그리고 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작은 시심(詩心)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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